[플레타] 맑은
맑은
WB. BM
의자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엔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 자리에 앉을 이들을 위해 제작되어 한 번 앉으면 다른 곳에서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포근하다. 초대 받아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 앉으면 다시는 그 방을 떠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착석한 이들은 모두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말했듯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표
모런과 대면한 것은 그 방에서였다. 플레타는 모런의 얼굴을 안다. 이름도 알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마주한 것이 처음인 거다. 막 청년의 티를 벗는 이 남자는 마치 금박을 입힌 동상 같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인상 깊어 후플푸프가 아니었다면 슬리데린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단호한 눈매와 여러 세대를 거쳐 가다듬어져, 유서 깊어 보이는 이목구비가 훌륭한 필기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플레타는 잠시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남자는 플레타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한다. 왜 그런지 몰라 그녀는 이전처럼 고개만을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을 고하자면 플레타는 푸르스름한 밤의 방, 그 자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그 남자를 앞서 유별나다 생각했던 적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여 이런 저런 별명도 붙여 주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프프리 부인 이었다. 종종 폼프리 부인이 자리를 비울 때면 아이들은 그 남자를 찾아가 치료를 요청하고, 그도 마치 어머니처럼 맞이해 주었던 것 같다. 이유는 몰라도 지독히도 사회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플레타는 그에게 ‘유별난’ 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모런은 가끔씩 뭔가에 질리다시피 지쳐있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친절하고 옳게 들릴 말들을 했기에 그녀는 연갈색 모래가 반쯤 차 있는, 모런이라는 작은 유리병에 ‘잔인할 정도로 반사회적이지 않음.’ 이라고 써 넣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플레타는 모런을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인물 박스로 밀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는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눈가로 밀어내는 바람처럼 궁금한 인물이었다.
아, 네 뒤에 아이가 있구나.
"왔어?"
모런이 플레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얼룩처럼 묻어나는 빛에 일렁이다 금방 꺼졌다. 플레타는 이 상황을 이전에 겪었던 것 같다. 기억은 쉽게 불려 나왔다. 방. 모두들 기꺼이 그 자리를 위해 죽을 조그마한 방이 플레타의 마음속으로 튀어 오른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그가 방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반가워요.' 그때도 그는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참으로 누군가를 맞이하는 자다. 플레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인다. 치워내는 자신의 손끝이 떫은 사과처럼 차게 얼어있었다. 몸은 종종 그녀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다.
“드디어 내 끝이야.”
그는 두 팔을 날개를 펼쳐내듯 벌린다. 눈가를 옅게 찡그리며 웃는다. 자 이제 내 마지막을 장식해줘.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타는 읽어낼 수 있었다. 모런이 남길 말로 이보다 더욱 어울릴 것은 없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모런을 겨눈다. 모런의 뒤로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인어가 제 온 몸으로 아름다운 색을 그에게로 쏟아내고 있었다. 살아있다. 늘 그렇듯이 모런은 지금 이 순간 온갖 빛에 둘러쌓여 숨 쉬며 생생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플레타의 목이 간지럽다. 그리고는 새삼 의문이 하나 잠잠하던 마음으로 떠오른다. 우리가 대화를 한 적 있던가요?
맑은
"안녕히."
알기로는 없다. 그러나 대신 나오는 것은 떠나보내는 이를 위하는 마지막 인사다. 둘은 방에 남아 차 한 잔 나눈 적 없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자처하고 그 마지막을 홀로 둘 수 없어 기꺼이 따라 나와 성사된 이 만남이, 처음과 끝 모두 누군가를 맞이하는 모런의 손짓과 그 죽음을 두 눈 치켜뜨고 지켜보고자 하는 걸음이 만든 이 공간 자체가 어떤 대화일지도 모른다.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담소지만 그것 또한 괜찮았다. 플레타는 잠시 창문을 응시하던 제 시선을 거두고 모런의 두 눈을 바라본다. 맑다. 플레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에베르테 스타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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