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AU] 벽
벽
< R I V E R & L A U R E N T >
그녀는 특정한 그의 손길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녀보다 몇 개월은 더 어린 손은 서로 맞닿으면 뜨겁고 멀리 두면 차다. 그 손은 잠깐 그녀의 눈앞을 스치다가 가까스로 회색 천으로 싸인 책가에 매달린다.
이 공간, 창 바로 뒤가 높은 담장이라 볕은 정오에만 가까스로 들고 팥색 벽돌과 듬성한 덩굴들 뿐이다. 리버는 이 공간에 앉을 때면, 창밖으로 어두컴컴함에 물들어 파리한 이파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갓 중학교에 입학한, 여전히 소년인 아이들의 손으로 닦아지는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서는 누구도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다. 드물게 늦은 저녁 비치는 모습을 그 뒤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라면 몰라도.
도서관의 내부 인테리어는 큐브릭 영화 속 장소 같았지만 학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건물 자체는 그대로였다. 차마 전부를 허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아이 키만한 창문과 거대한 창틀에 둘은 올라앉고서도 옆에 책을 쌓아둘 수 있었다. 이 창문은 학생들이 좀처럼 발길을 두지 않는 곳인데 책장 가득 희랍철학, 특히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저서로 가득 찬 플라톤의 벽을 돌아야 겨우 나오는 구석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어둑했고 해가 빨리 떨어지기 시작하는 늦가을엔 하교시간만 되어도 서로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오에는 책을 들고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찾는 책이 급한 행색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려야했다.
로렌은 오랜만에 고전이었다. 그녀의 왼쪽에는 몇 권의 책과 그녀의 작은 수첩 그리고 로렌의 손가락들이 있다. 리버는 읽어야하는 책을 들어 옆에 앉아 있는 이가 그러하듯 머리끝까지 덮어버린다.
글자는 평소보다 가깝다. 미묘하게 인상을 쓰면 분명해졌다가 금방 흐려진다. 안경을 가지고 올걸 그랬어. 짧은 생각이 지나가고 페이지가 넘어간다. 새로운 페이지는 자신의 엄지를 따라 움직이는 이전 페이지에 의해 드러나고 리버는 그 눈을 다시 왼편으로 둔다. 그러면 이어지는 전개에 앞서 그의 손가락이
"리버"
로렌은 상체를 비스듬하게 튼다. 책은 여전히 그의 머리에 붙어있다. 마침 리버는 이미 새로운 문장을 출발했기에 별다른 답을 줄 수가 없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느라 몸을 그에게로 틀었다.
"리버"
몇 번인가 왼편으로 시선이 쏠렸으나 찬 기운이 아래로 쏠린 유리뿐이다. 한 문단이 끝났다.
"응"
"재밌어 보이는 책이네요."
"응. 재밌어. 여기 나오는 사례들 다 제정신이 아니야."
리버는 곧 다음 문단을 눈으로 집어내고 허겁지겁 첫 줄에 오른다. 로렌은 새 말이 없다. 리버는 뭘 보려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는데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야에 희미하게 걸린 로렌의 안경이 얼핏 빛을 반사하였던 거 같아 그녀는 책을 조금 아래로 내려 앞을 본다. 그는 이미 그녀처럼 하고 있었다. 로렌은 리버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읽던 책 제목을 소리 냈다.
정수리부터 긴 타원형으로 일그러진 빛의 그림자, 붉은 머리가 썰어 놓은 당근처럼 투명하다. 그 심지가 달다. 오래 서로에게 눈빛을 걸어둔 것도 아닌데 너무 영겁이라 어느새 시간의 흐름을 놓친 것만 같다. 리버는 남들이 쉽게 호감 가질만한 표정과 멀다. 특히나 그녀의 눈빛을 달가워하지 않는데 로렌은 괜찮았다. 게다가 지금, 너무 가까워서 서로 마주보고 누워 맑은 유리알을 뚫어 저 검은 구멍 아래까지를 훑고 있는 것만 같다. 속눈썹에 걸린 도서관의 먼지 한 가닥,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유치한 발언일지는 몰라도 그는 리버를 꽤 오래 기다려주었고 이제는.
로렌은 주근깨가 퍼져나가는 그 얼굴 전체가 보고 싶어 들고 있던 책을 내리고 덮는다. 어디까지 읽었는가 아예 묻어버린다. 리버는 조금 늦게 수첩 위로 책을 치웠다. 리버는 몸을 바로 한다. 그의 가까이에선 가끔 강한 색이 끈적하게 뒤섞이는 이미지가 느껴진다. 식으면 아름다운 마블링인데 그 전은 리버의 체온과 다르게 따듯하다. 그것이 이상했다.
"가야 해. 아마 오 분 전일 거야."
리버는 일어선다. 너무 재빠르게 제 물건들을 챙기고 섰다. 로렌은 불쑥 손을 뻗었는데 리버가 끊임없이 훔쳐보던 손이었다. 그건 리버의 팔을 쥐고 당겼고 그녀는 그 타인의 손을 다시 쥐어 하나하나 펼쳐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로렌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마가 닿는다. 리버는 책을 쥐고 있는 또 다른 손, 어리다고는 하지만 청년의 손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다 자란 손과 회색 천으로 덮인 양장 그리고 자신의 신발을 본다. 로렌은 정말 그대로 멈춰 선 리버에게서 미끄러지는 자신의 손에 힘을 준다.
"리버, 내가 키스해도 괜찮겠어요?"
리버는 얼었다가, 녹아서는 뒤로 다시 한 걸음 물러나고 로렌은 붙잡던 손을 떨군다. 그녀는 고개 돌리지 않고 로렌을 본다.
"지금 말고."
"나도 알아요. 그건."
리버는 바로 플라톤의 벽을 돌아 나가지 않고서 내린 로렌의 손을 잡아 올렸다가 놓고는 안녕, 한 마디를 둔다.
맞아요.
둘이 사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