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1

[리버] MUG GRAY

파란괴물 2013. 8. 15. 16:09



"Ms Gray, As You Like."





  리버는 불과 보름 전만 하더라도 은하계 하나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 주근깨가 아름다운 소년이 ‘이제 출발합시다.’ 그렇게 말하기만 하여도 소규모 은하 하나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그 먼지들이 새로운 별의 탄생을 준비할 것인데 소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로운 출발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소년이 머뭇머뭇 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를 삼일 째, 리버는 그저 자신이 지쳤거니 생각했다. 

   주근깨 소년은 말없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 봤다. 둥글넙적한 엄지 옆으로 검지 발가락이 솟았다. 이런 발을 가진 아들 딸을 둔 어미는 그 아비보다 빨리 죽는다던데 소년의 어머니는 딱 그 말 대로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모든 장비를 확인했다. 이제… 소년의 확신에 찬, 미래로 튀어나갈 듯한 외침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말이 없다. 답이 없다. 소리가 없다… 그 소년의 모습에 불안해 한 것은 그의 아버지도 엔진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던 아저씨도 초조하게 오더키를 쥐고 있는 젊은 여자도 아닌 바로 리버였다. 비록 도망자 신세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있었고 큰 안전의 위협도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가죽을 덧댄 나무 의자에 앉아 무료한 듯 톡톡톡,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듯 내지는 베토벤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처럼 광폭하게 자판을 괴롭히는 것 밖에 없었는데도 소년이 목소리를 끄집어 내지 않아 물 끓는 주전자처럼 빽빽 비명을 지르는 건 리버였다. 난관에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리버는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모르고서 자신이 미쳤거니 생각했다.

   하는 수 없이 리버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잘려야 하는 말허리를 정원사 나무 손질하듯 싹둑 자르고, 계절 맞지 않는 촌스러운 도자기 장식들을 치우고, 제 갈길 못 찾은 귀여운 24개의 알파벳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했다.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이었다. 이런 모습에 놀란 건 그녀의 거지같은 편집장이 아니라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준 친구였다. “너 미쳤어?” 친구는 그렇게 물었다. “아니.. 음… 아니. 미친 거 같아.” 리버는 그렇게 답하고서 사라진 마침표를 5장 끄트머리로 돌려보냈다.

   새삼스러운 것은 친구의 반응이 아니라 리버였다. 리버는 꾸준한 성격이 되질 못했다. 이 상황을 ‘여느 때’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그녀는 잠시 자판을 멀리하고 며칠을 푹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잠시가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그렇게 삼주를 넘어서 한 달로 치달을 즈음 편집장과 굶어 죽을 거냐는 친구의 잔소리에 다시 자판 앞으로 떠 밀려 갔을 텐데 이번에는 거머리처럼 자판에 들러붙어 있는 쪽이 리버였다. 그녀의 편집장이 보았을 때엔 잘 된 일이었지만 리버의 친구에게 드문 드문 들리는 자판 소리는 그녀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으로 들렸다.


 


   닷새 후, 리버의 시간여행은 끝이 났다. 다시금 붉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소년의 앞에 섰다. 말해. 어서 출발하라고 말해. 소년은 자신의 맨발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앞에 자리한 여자의 발을 본다. 보라색으로 칠을 했네요. 소년의 눈길이 그렇게 말했다. 묵직한 침묵이 사방팔방으로 빛을 반사해대는 하얀 방 구석구석으로 튕겨 나갔다. 점. 점. 점. 여자의 눈앞에 고딕체의 마침표가 크게 세 개 놓였다. 그리고 그 마침표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소년의 시선은 여자의 발에 올라타서 다리로 기어 올라왔다. 골반을 지나서 허리를 짚고 가슴을 넘어 여자의 어깨로. 그리고 주근깨 총총히 박힌 붉은 머리 소년이 고개를 온전히 다 쳐들고 ‘이제 출발합시다.’ 대신에 ‘리버, 나 더 이상 못하겠어요. 출발하라고 말 할 수 없어요. 모두 멈춰요. 우린 여기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주 똑바르게 리버와 눈 맞춘다. 여자는 너무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동시에 자판이 달궈진 자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뗐다. 리버는 얕게 숨을 내뱉으며 화면을 바라본다.

 


"… ㅣ



리버가 마주하기를 피한 문서에서 소년은 … 그리고 다른 말없이 커서만을 깜빡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검다. 화면이 참으로 검었다. 글자들로 빽빽히 채워져 소년이 터놓은 커서 뒤로는 숨 쉴 틈이 없다. 테세우스가 바꿔 달기를 깜빡한 조기처럼 새카맣고 불길했다. 그래서 리버는 아이게우스처럼 온 몸을 고꾸라뜨려 아래로, 아래로 자신을 처박아 넣었다.



***


 

   학창시절 노직을 신봉하던 참 잘난 놈이 하나 있었다. 그 녀석은 결 좋게 넘실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합이 아주 훌륭했다. 말하자면 외모로 남자와 여자를 여럿 울렸다. 제 어미도 아비도 그렇게 훌륭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놈은 자기 입으로도 자신이 집안의 변종이라고 했다. 그래, 우연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복권 당첨자를 뱉어 내듯이 이렇게 ‘탁월한’ 외모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놈’은 남학생이었고 머리도 아주 좋아 멘사 회원이었다. 이 어이없는 운의 배분을 더 말하자면 그는 키도 컸다. 목소리도 좋았다. 성격도 자신이 잘난 줄을 알고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과한 자신감만 빼면 아주 좋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잘난 외모와 타고난 말재주 그리고 똑똑한 머리로 한 자리 꿰차도 약자를 잊지는 않을 정도의 배려심까지도 가진 미래 유망주였다는 소리다. 그는 롤즈가 정의론을 얘기한 것은 아주 ‘탁월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사실 자신이 이룩한 성취를 멍청하고 느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며 비웃었다. 사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열심히 해서 번 것이 아주 정당하다, 노직에 찬성한다고 손들 들어 올린 아이들의 거친 주장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롤즈의 편에 섰던 리버는 기가 찼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히나 여겨 이 머저리들아.

   그래도 리버는 자신에게 재능의 i, 그 위의 점만큼이라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감사해했다. 건반위에서 손을 굴리는 능력은 평범하지 않아서 뽑기에서 경품을 뽑은 격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앞으로 이런 한심한 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되겠지하고 방심했는데 주변인 모두가 허탈해 할 정도로 쉽게, 그리고 빠르게 리버는 레코딩 음반 몇 개를 끝으로 피아노 의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노직과 롤즈의 틈새로 되돌아갔다.


 


   옥스퍼드대학의 식당은 융합적 인재를 끌어내기 위해 늘 시끄러웠다. 여러 과 학생들은 밥 먹는데 집중하는 대신에 음식은 코로 집어넣고 자신의 입이 똑바른 말을 하고 있는지, 저 새끼가 무슨 소리로 짖어대는지를 신경 썼다. 그런 난장판에서 리버라고 해서 다른 과 아이들이 피해갈리 없었다. 특히나 리버는 대학 초에 어떤 교수님과의 해프닝을 만들어낸 학생이었기에 아이들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려하지 않았다. 늘 그녀에게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리버가 참다못해서 아주 정중하게, 그러나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생각은 너네들 스스로 하면 안 될까? 난 좀 쉬고 싶은데. 그리고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전과하든지 수업을 듣든지 나랑 아주 친해지든지 아니면 내 블로그라도 해킹하든지. 제발 날 좀 놔둘래? 내 빵이 스프에 처박히는지 물에 빠져 스펀지밥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거든.’ 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노골적인 언사에 리버에게 세상의 운을 어떻게 건드리냐며 차라리 노직이 현실적이야, 그렇게 말하던 코크니 사투리를 쓰는 런던 출신 줄리아는 ‘네 잘난 줄 아는 게 꼭 에드워드 꼴이군, 너도 알지? 그 잘난 금발새끼가 장애인이 됐듯 너도 조심해. 롤즈를 그저 네 미래를 위한 보험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말이야’ 라며 리버에게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하지만 리버는 자신도 알고 있을 금발 에드워드 새끼를 기억해 냈고 장애인이라는, 그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단어를 이어 붙이느라 기분나빠할 겨를이 없었다. 일주일간의 노력끝에 리버는 겨우 겨우 재수 없는데다가 금발인 에드워드와 다시 연락할 수 있었는데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후였다.

   에드워드는 퇴물이 된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중 재수 없게도 거친 녀석들의 총격전에 휘말렸고, 운 좋게도 살아남았지만 척추에 박힌 총알로 인해서 말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비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잘난 놈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그런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것은 밤늦게 돌아다니던 개인의 잘못이고 그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놈이 됐다. 이젠 왜 그게 자신이여야만 하냐고 통탄해 하는 불쌍한 청년일 뿐이었다. 똥오줌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산송장, 리버는 알고 있었음에도 세상은 참, 능력이 곧 모든 것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지금 리버가 전신을 아래로 던진 시점에 다시 찾아왔다. 자신보다 내용 없고 그 겉만 번지르르한 글은 때 마침 눈에 띄어 운 좋게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고, 모두가 SNS라는 사이렌에 홀려 돈을 주고 책을 구입할 때 자신이 곧 ’신’인 노트북 앞에서 인류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의 입 하나를 움직이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꼴이라니! 자신감 넘치는 필체로 MUG GRAY 라고 이름 쓴 첫 원고가 좋지 않은 성적으로 소수의 매니아층만 만들어 왔을 때 구멍 난 양말보다도 못한 아류의 아류냄새가 폴폴나는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스토리는 대충 이렇게 해요. 누가 이런 SF를 봅니까. 미스 그레이, 만약 또 다시 그렇게 인류를 초토화 시켜버리면 …. 이 다음은 힘들 거예요.’

   처녀작은 리버 스스로 자신했다. 재조명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출판사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10만의 인류를 위해 함선을 출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리버는 떠날 수가 없었다. 차분히 태어났던 그 자리에 서서 은하계를 가루삼지 않고 조용히 내일도 그 내일도 100년이 넘어가는 그 날에도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류의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리버는 쌩 하니 종족을 위함이라며 가뿐하게 나아갈 수 없다. 도저히 그 아기를 놔두고 지구를 떠날 수 없었다.


 

아기.



‘그 아기. 그런데 이 아기는 어디에서 왔지?’


리버는 눈을 가린 채 소파에 늘어져,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스테이크 행세를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주근깨 소년은 자꾸만 한 아기가 마음에 걸려 출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꼬마 공주님. 엄마의 품에 쏙 안겨 울지도 않고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아기가 리버에게 있다. 하지만 도대체 현실인지 꿈인지 상상이었는지 분간할 수도,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도 없는 곳에 아기는 있었다. 리버는 당장에 그 아기에게 답이 있을 것을 알았으나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결국 문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

 

 

   가끔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법이다. 리버가 꼭 그러했다. 자신을 담당하는 불쌍한 해리는 마지막 부분에 와서 미쳤냐며 계약해지금을 운운해댔다. 그는 리버가 글을 똥 같은 글이라도 완성해 가기만 하면, 진짜 똥은 아니라는 이유로 괜찮다며 출판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작가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식으로다가 ‘개똥도 필요한 사람이 있듯이 글도 그런 거 아니겠어요?’ 시발. 하지만 작가가 똥만도 못한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좋아하면 그건 무슨 고문이냐는 말이다. 작가는 그 끔찍함에 통장에 날아와 꽂히는 인세를 보며 더욱 절망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 갈 거다. 그건 거짓으로 사는 세상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거짓만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라는 것을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말해주기에 차마 부정할 수 없어, 실성한 나무에서 난 이른 이파리처럼 얼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고문을 말하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는 게 어디냐며 배부른 소리 한다 인생 설교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리버는 그런 식으로 양심을 팔아 배부르니 차라리 인간임을 포기하고 연쇄살인마가 되어 자신의 철학을 펼칠 여자였다. 따져 보면 모두가 회사 책상에 앉아서 혹은 두 부인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지구가 돈다고 말할 것인가 목숨을 위해 입 닥치고 부를 위해 거짓말까지 할 것인가 그런 식으로 한 번씩은 겪는 문제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부딪힌적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학부시절의 리버는 자신의 뒤에 봐줄 만한 가족이 버티고 있었다는 걸 아주 잘 알았으니 자연주의의 오류를 칸트가 해결할 수 있다는 과격하고 겁 없는 미친 소리를 굽히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뒤엔 아무도 없었고 그녀 명의로 된 통장은 금지된 지 오래에, 당장에 쥐고 있는 처녀작 인세도 별로 남아 있질 않았다. 모두 눈 감고 넘기는 문제인데 리버는 아직은 배가 부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살인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편집장이 아니다. 아예 범죄자로 이직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리버는 오랜만에 성질이 제대로 났다. “누가 진짜 돈이 없어서 계약해지를 못하나 인터폴이 무서워서 못하지.” 여자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좀처럼 자제하던 외출을 마음먹는다. 바닥으로 뛰어 들고 자판이 사막의 태양으로 달궈진 철판인양 손도 대지 않은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리버는 햄엔 포크(리버는 이 가게를 볼 때 마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에서 클럽 샌드위치를 꼭 가게에 앉아 양상추 하나까지 싹 쓸어 먹고 가던 것과 다르게 포장을 부탁했다. 금발 머리 아르바이트생은 생글 생글 웃는 낯으로 늘 가게에서 먹고 가던 그녀의 안부를 걱정했다. 돈벌이에 지쳐 서비스용 미소를 지워내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돈, 그놈의 돈. 리버는 넌더리가 난다. 그래서 여자는 잘 깜빡이지도 않는 눈을 감으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리버는 그저 아무 바위에나 가 박혀 화석이 되고 싶었다. 이왕이면 자신의 고향인 데본셔 바닷가의 돌이 되어 파도에 깎이고 깎이고 또 깎여 모아이석상처럼 네모로 우뚝 서고 싶다. 그러다 제 몸이 다 쓸려 가면 쓸려가는 대로, 그 거센 파도에 맞서는 그 임무를 다 행했다는 기쁨으로 잠들고 싶었다. 그런 시원한 심상이 곧 파도를 피해 달아나는 법인 줄은 모르고서.


 


“당신의 재능을 제가 사겠어요!”

리버는 눈을 떠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미쳤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여자가 서 있었다. 이열치열이라지만 목도리는 너무하잖아? 그러다가 곧 바로 자신도 우비를 하나 장만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 파는 거 아닌데요.”

땡땡이 무늬가 어지러워 정신이 사납다. 동그라미들은 갑갑한 천 쪼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건 원피스의 끝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동그라미들이 여느 때보다도 더욱 부산스러운 것은 아마 원피스 위로 숨 쉬기 힘들 비닐 우비가 자리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우비는 리버 자신에게 맞을 만큼 컸다.

“당신 예술가 아니에요? 아, 참! 난 엔젤이에요.”

자신의 이름을 엔젤이라고 소개한 통에 리버는 잠시 그녀가 왜 선량한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다가 조금 늦게 이름인 줄을 알았다. 엔젤의 목소리는 트롤리 샤우어의 하얀 가루처럼 시다.

“작가죠.”

“그 손가락으로 글만 쓴다고요?”

“네.”

리버는 여성스럽고 애교스러운 축에 끼는 엔젤의 목소리를 찬찬히 훑다가 여자가, 혹은 소녀가 한 붉은 색 목도리를 보고 자신이 주문한 샌드위치의 햄을 떠올렸다. 여자의 볼도 불 오른 그릴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잘 익은 얼굴 위로 사과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팝아트적인 의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여자는 땀이 소나기처럼 가득 찼을 것 같은 겨울용 어그부츠를 신고 있었다. 또, 짝이 다른 양말이 어그부츠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차림 하나 하나에는 어울리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이다. 양말은 사람이 때로는 마음에 드는 양말 두 컬레를 모두 신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크게 고개 저을 일은 아니었다. 어그부츠도 우비와 나름 짝을 이뤘다. 땡땡이 원피스는 투명한 비닐 우비 안에 옷을 입지 않는 것이 더욱 이상한 사람일 테니 납득이 되었다. 다만 조금 아이러니 한 것이 목도리였는데… 뭐 여름에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지. 리버는 이 여자를 안다. 소년이 실어증에 걸리기 전까지 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몇 번이고 이 조랑말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묘하게 짝이 맞는 옷차림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낙이기도 했다.

“뭐-어. 어쨌든 제가 당신에게 집을 빌려 줄 게요. 물론 공짜. 생활비도 드리고요. 대신.”

“대신, 뭐. 그 집 페인트 유독성 실험하고 그런 거예요? 아니면 다큐멘터리? 죄수와 간수 같은 심리실험?”

“아니요! 요즘 만나는 사람들 마다 의심이 더욱 깊네요, 그런 게 아니에요. 꿍꿍이 있어 보이지만 없다는 게 반전이랍니다. 다만 내 지원이 헛되지 않도록 렌트에 머물며 자신을 다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세요.”

“못 받으면? 그땐 제 장기를 기증해야 하나요?”

“음, 그때 가서 도로 다 토해내시든지요.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읽었거든요.”

뭘요? 그렇게 되물으려다 리버는 참으로 헛된 일임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녀작일 것이 분명했다. 엔젤은 꼭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몇 마디 더 하더니 종이를 하나 건네고 사라졌다. 리버는 되묻지 않음과 동시에 모든 답을 함구했다. 엔젤이 가겠다며 인사를 건넬 때에도 답하지 않았다.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너무 거대한 탈출구라 그 불안함이 배였다. 교수가 자신에게 같이 연구할 것을 제안할 때 느꼈던 것 보다 더욱 거센 불안과 흥분이 리버를 빨아들였다. 리버는 그만 입맛마저 달아나서 길거리 부랑자에게 자신의 샌드위치를 건네고는 집으로 올라갔다.


 


   친구는 리버가 미쳤다고 했다. 정신병자 도와주느라 유괴범 되어서 인생 말아먹기 직전까지 밀려 온 주제에 정신을 못 차렸다고 주절 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넌 예전부터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나 만나기 전의 친구들을 봐도 그래. 야, 너 만약 거기서 잘못 되어서 내가 경찰을 불러 준다고 해도 그 다음엔? 영국으로 강제 소환이야. 그리고 감옥에나 가겠지! 어쩌면 널 싫어하는 족속들이 너가 싸이코패스라고 증언해 줄지도 몰라. 정신 차려, 리버.” 리버는 친구의 ‘비난’이 조금 거슬렸지만 크게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친구의 약혼자가 리버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기에 결국 그 비난은 친구 스스로도 바보라는 걸 증명하는 꼴 밖에는 안 되었다. “리버, 거기 가면 그게 호구 등신이야. 나는 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냥 적으면 되잖아. 그냥 그 소설 마무리 하면 되잖아. 네가 정 못하겠으면 내가 대신 마무리 해 줄게.” 응? 하고 친구는 소파에 난 주름만 응시하고 있는 리버를 달랬다. 그곳에 가지마. 어딘 줄을 알고 가. 미국엔 또라이들이 더 많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사실 네가 바라는 마지막이 더 이상한 걸 수도 있어. 문제의 그 소년이 가자고만 하면 은하계 하나가 전부 사라지더라도 그… 어쨌든 그걸로 다시 지구를 세우고 우주선으로 대피했던 인류가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잖아. 너는 왜,” 친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리버가 끌어내려는 마지막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말인지 새삼 느꼈을 것이다. 왜. 너는 굳이 죽으려고 하니? 그러나 친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지구에 남아있는 인간들 때문에 인류의 뜻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건데? 뭐야, 공리주의가 문제야?” 

‘아니, 꼭 공리주의가 문제인 건 아니야, 엠마. 그걸 문제로 빌빌거린다면 마이클 센댈에게 이 메일이라도 보내지. 물론 그가 공동체주의자인 걸 감안하면, 답은 뻔하지만.’ 

“좀!” 

‘엠마, 나는 가끔씩 네가…’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정말로 짜증나.’

 

 

 

   리버는 엉덩이 아래로 너무 푹 꺼지지도, 늪에 드러누운 듯 전신을 끌어당기지 않는 이 소파가 좋다. 아주 적당한 탄력. 아주 적당한 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데 이 소파는 그런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리버는 이 소파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리버는 조용히 대합실 소파에 앉아서 이 아파트가 정말로 어떤 곳일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먼저 리버의 왼발 새끼발가락에서 2시 방향, 누가 의자를 바닥에 놓고 휘두르기라도 하였는지 얕지만 강하게 반원을 그린 자국을 보자. 이건 가구 운반 도중에 불쌍한 바닥을 짓누른 흔적일 수도 있지만 살고 싶어 하는 이가 발악하는 소리 대신 그 설움으로 유언 남기듯 기록해 놓은 흔적일 수도 있었다. 하긴, 이곳은 예술가들이 사는 아파트라고 하였지. 모두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단지 성공만을 위해서 예술을 그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건 예술가라고 부르기도 참 민망하고 애매한 존재였다. 그러나 리버는 애초에 엔젤이라는 여자가 입주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모르는 여자에 대한 광신도 못지않은 믿음이 솟구쳐 그 흔적이걸랑 누군가의 상처겠거니 생각했다. 

다음으로 이 아파트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모두가 각자의 작업공간을 존중하고 있었다. 무례해도 정말로 무례하지는 않았고 침착한 이들 역시 정말로 침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억지로 사회화되다만 각자가 스스로의 폭탄을 안고 언제 터트릴 것인가 그 시기를 노리고 있는 듯 했다. 리버는 렌트가 아주 새로운 곳은 아니라는 느낌에 조금 안도했다.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리버는 고개 들지 않았다. 아직은 외부인인 자신은 그저 모두가 거쳐 가는 대합실 그 소파처럼 가만히 앉아서 이곳이 가짜인가 진짜인가 그걸 간파해보고 싶을 뿐이다. 진짜인가 가짜인가, 가짜인가 진짜인가하는 물음 만큼 이나 진실찾는 거짓말 같고 거짓말 같은 고뇌였다. 몇 번인가 손가락으로 허공 연주를 하던 리버는 스스로 만족해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과연 세상보다는 진짜 같았다. 

 

 


노크는 두 번. 리버는 같이 미국으로 건너온 남자와 정했던 신호가 떠올랐다. 노크 두 번, 위험하다. 노크 한 번, 안전하다. 리버는 시작을 좋게 하고 싶었다. 노크 한 번만 하는 거야. 그런데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재빨랐다.

"뭐."

집시. 리버는 히스클리프를 떠올렸다. 그건 그가 집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집시 태생의 히스클리프를 떠올린 것인지 그의 차림이 히스클리프만큼이나 신경질적으로 보였기에 밑도 끝도 없이 캐서린 하나만을 쫓았던 그 남자가 떠오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리버는 그가 J.J임을 확신했다. 

"뭐가요?"

"당신 말이야."

"전 머그 그레이에요."

"J.J, 용건은?"

"엔젤이 당신을 찾으면 된다고 했어요."

"아. 그 여자가? 제대로 찾아 왔어."

"나도 알아요."

남자는 방문을 열다 말고 리버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리버는 어쩐지 해명해야 할 거 같아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J.J라고 말했으니까요. 남자는 비웃음보다는 조금 멀고 불쾌함보다는 더욱 멀며 철없는 대꾸에 반응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함에 가장 가까운 몸짓으로 방문을 열었다. 갇혀 있던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밀려왔다. 뿌연 공기로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그 향이 아주 지독했다. 담배를 모르는 아이라면 그의 방을 독가스실로 착각할 정도였다. 리버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오래 참아보려 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다. 남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의 침대 옆 금고로 다가갔는데 그가 금고를 열고 건네줄 무언가를 꺼내는 동안 리버는 질식해 버릴 거 같았으므로 조용히 뒷걸음질 쳐 문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천천히 금고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 또 그것을 한참 살펴보더니 몸을 돌려 리버를 찾았다. 

"이게 열쇠야. 뭐야, 입주 안 해?" 

그는 복도에 서서 방문이 닫히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리버를 보며 귀찮게 금고를 왜 열게 했냐는 한탄 섞인 짜증을 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리버는 담배연기를 적게 마시려고 아주 작게 말했다. 덕분에 남자는 리버가 입주하지 않기로 했는지, 입주하기로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열쇠를 자신의 주머니로 집어넣었는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망설였음에도 다급해진 리버는 덜컥 소리를 내질러 버렸다.

"아니! 잠시 문턱에 대해서 생각 하느라요! 주세요, 열쇠."

허, 참. 그래 여긴 별난 놈들이 오는 곳이지. 그는 큰 표정대신 호흡이나 움찔거리는 미간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리버에게로 걸어왔다. 치렁치렁한 머리와 하늘하늘한 옷이 집시와 또, 사막의 부랑자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라비안나이트에 아주 어울리나 싶었으나 리버는 그 정확한 시대를 몰랐고 또 의상도 제대로 몰랐으니 자신의 감상을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리버가 그가 신은 검정과 하얀 스트라이프 슬리퍼가 무언가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즈음 J.J는 리버가 내민 손 위로 방 열쇠를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리버는 열쇠 하나만 쥐고 렌트를 나왔다. 그녀는 일단 렌트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고 싶어 왔으니 단신이었다. 친구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남아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핸드폰 밧데리가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친구 집에 가서 렌트로 자리 옮김을 선언하고 잔소리를 들어가며 짐을 싸면 내일엔 친구의 약혼자가 리버를 말릴 것이다. 그러나 모레가 되면 자신은 이미 그 곳에 없을 터였다. 밖은 아직 해가 시간을 잊은 듯 밝았다. 그리고 일순간 망치가 못을 벽으로 밀어 붙이듯 강하게, 

 

아, 기억났다. 그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