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서서 허리를 펴고, 똑바로 하여 숨을 가다듬고 오른팔을 쭉 옆으로 뻗는다. 마른 나무가 불타듯 혹은 겨울을 지낸 가지에 이파리가 돋아나듯 펼쳐낸다. 눈을 감고 꼭 몸을 풀어내듯이 공중을 몇 번 가르는 손짓을 하다 눈을 뜬다. 잠에서 막 깨어난 무언가처럼, 다시 세상으로 제 시야를 돌려보내는 순간을 천천히 마주한다. 그러나 잠에서 헤어나지 못해 괴로운 아이처럼은 아니다. 그저 어떤 새로운 것이다.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속을 헤집는 생의 약속 같은 숨들과 손 끝을 스치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구슬들에게만 집중한다. 그녀가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녀는 울 수도 있었다. 눈물은 본래 담고 있는 것이 땅에 귀속된 것이라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더욱 쉽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뜨고 저 너머에 무언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시선을 올려다 봤다. 밤 바람이 조약돌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은반지처럼 차다. 그리고 살아있다. 숨은 또 다시 그녀에게서 흘러 흩어진다. 아침이 오면 숨어들 어둠이 아름다워서 플레타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특정한 그의 손길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녀보다 몇 개월은 더 어린 손은 서로 맞닿으면 뜨겁고 멀리 두면 차다. 그 손은 잠깐 그녀의 눈앞을 스치다가 가까스로 회색 천으로 싸인 책가에 매달린다.
이 공간, 창 바로 뒤가 높은 담장이라 볕은 정오에만 가까스로 들고 팥색 벽돌과 듬성한 덩굴들 뿐이다. 리버는 이 공간에 앉을 때면, 창밖으로 어두컴컴함에 물들어 파리한 이파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갓 중학교에 입학한, 여전히 소년인 아이들의 손으로 닦아지는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서는 누구도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다. 드물게 늦은 저녁 비치는 모습을 그 뒤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라면 몰라도.
도서관의 내부 인테리어는 큐브릭 영화 속 장소 같았지만 학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건물 자체는 그대로였다. 차마 전부를 허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아이 키만한 창문과 거대한 창틀에 둘은 올라앉고서도 옆에 책을 쌓아둘 수 있었다. 이 창문은 학생들이 좀처럼 발길을 두지 않는 곳인데 책장 가득 희랍철학, 특히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저서로 가득 찬 플라톤의 벽을 돌아야 겨우 나오는 구석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어둑했고 해가 빨리 떨어지기 시작하는 늦가을엔 하교시간만 되어도 서로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오에는 책을 들고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찾는 책이 급한 행색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려야했다.
로렌은 오랜만에 고전이었다. 그녀의 왼쪽에는 몇 권의 책과 그녀의 작은 수첩 그리고 로렌의 손가락들이 있다. 리버는 읽어야하는 책을 들어 옆에 앉아 있는 이가 그러하듯 머리끝까지 덮어버린다.
글자는 평소보다 가깝다. 미묘하게 인상을 쓰면 분명해졌다가 금방 흐려진다. 안경을 가지고 올걸 그랬어. 짧은 생각이 지나가고 페이지가 넘어간다. 새로운 페이지는 자신의 엄지를 따라 움직이는 이전 페이지에 의해 드러나고 리버는 그 눈을 다시 왼편으로 둔다. 그러면 이어지는 전개에 앞서 그의 손가락이
"리버"
로렌은 상체를 비스듬하게 튼다. 책은 여전히 그의 머리에 붙어있다. 마침 리버는 이미 새로운 문장을 출발했기에 별다른 답을 줄 수가 없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느라 몸을 그에게로 틀었다.
"리버"
몇 번인가 왼편으로 시선이 쏠렸으나 찬 기운이 아래로 쏠린 유리뿐이다. 한 문단이 끝났다.
"응"
"재밌어 보이는 책이네요."
"응. 재밌어. 여기 나오는 사례들 다 제정신이 아니야."
리버는 곧 다음 문단을 눈으로 집어내고 허겁지겁 첫 줄에 오른다. 로렌은 새 말이 없다. 리버는 뭘 보려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는데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야에 희미하게 걸린 로렌의 안경이 얼핏 빛을 반사하였던 거 같아 그녀는 책을 조금 아래로 내려 앞을 본다. 그는 이미 그녀처럼 하고 있었다. 로렌은 리버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읽던 책 제목을 소리 냈다.
정수리부터 긴 타원형으로 일그러진 빛의 그림자, 붉은 머리가 썰어 놓은 당근처럼 투명하다. 그 심지가 달다. 오래 서로에게 눈빛을 걸어둔 것도 아닌데 너무 영겁이라 어느새 시간의 흐름을 놓친 것만 같다. 리버는 남들이 쉽게 호감 가질만한 표정과 멀다. 특히나 그녀의 눈빛을 달가워하지 않는데 로렌은 괜찮았다. 게다가 지금, 너무 가까워서 서로 마주보고 누워 맑은 유리알을 뚫어 저 검은 구멍 아래까지를 훑고 있는 것만 같다. 속눈썹에 걸린 도서관의 먼지 한 가닥,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유치한 발언일지는 몰라도 그는 리버를 꽤 오래 기다려주었고 이제는.
로렌은 주근깨가 퍼져나가는 그 얼굴 전체가 보고 싶어 들고 있던 책을 내리고 덮는다. 어디까지 읽었는가 아예 묻어버린다. 리버는 조금 늦게 수첩 위로 책을 치웠다. 리버는 몸을 바로 한다. 그의 가까이에선 가끔 강한 색이 끈적하게 뒤섞이는 이미지가 느껴진다. 식으면 아름다운 마블링인데 그 전은 리버의 체온과 다르게 따듯하다. 그것이 이상했다.
"가야 해. 아마 오 분 전일 거야."
리버는 일어선다. 너무 재빠르게 제 물건들을 챙기고 섰다. 로렌은 불쑥 손을 뻗었는데 리버가 끊임없이 훔쳐보던 손이었다. 그건 리버의 팔을 쥐고 당겼고 그녀는 그 타인의 손을 다시 쥐어 하나하나 펼쳐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로렌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마가 닿는다. 리버는 책을 쥐고 있는 또 다른 손, 어리다고는 하지만 청년의 손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다 자란 손과 회색 천으로 덮인 양장 그리고 자신의 신발을 본다. 로렌은 정말 그대로 멈춰 선 리버에게서 미끄러지는 자신의 손에 힘을 준다.
"리버, 내가 키스해도 괜찮겠어요?"
리버는 얼었다가, 녹아서는 뒤로 다시 한 걸음 물러나고 로렌은 붙잡던 손을 떨군다. 그녀는 고개 돌리지 않고 로렌을 본다.
"지금 말고."
"나도 알아요. 그건."
리버는 바로 플라톤의 벽을 돌아 나가지 않고서 내린 로렌의 손을 잡아 올렸다가 놓고는 안녕, 한 마디를 둔다.
누가 나를 보고 ‘밤처럼 차려 입었다.’ 라고 하더군요. 난 물었죠. ‘밤처럼?’ 꼭 어디 파티에서 도망쳐 온 것 같구먼. 난 맞아요, 도망인지는 몰라도 몰래 빠져나오긴 했죠. 그렇게 답했어요. 안쓰러웠는지 숄을 건네주더라고요. 끝자락에 맥주가 묻어 있었죠. 괜찮다고는 했지만 추워 보인다더군요. 그래서 추워 보이는 건 당신이 춥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재빨리 빠져나와 날았어요. 아가씨, 하고 따라 나왔던 거 같은데, 자신이 했던 말 속에 나오는, 밤처럼 차려입은 여자는 볼 수 없었겠죠. 오직 밤만이 그 사람을 맞이했을 거예요.
알아요.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걸.
혹시 래번클로 기숙사에서 쪽지를 발견했던가요? 뭐, 언젠가, 후배가 찾아내겠죠. 지금 찾아냈다고 해도 그 쪽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만한, 가령 누군가의 죽음이라든가 하는, 사건이 생기는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일 테니까요. ‘곧’은 다 다른 거잖아요.
이것도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죠. 난 그냥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한껏 온몸으로 생각이 차올랐다가도 막상 소리 내어 말을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모두 쏟아내고 갈 수 있도록...
말했듯이 나는 기숙사 휴게실에 쪽지를 두고 갔어요. 학교에 더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있을 수도 없었고요. 꿈이라고 한다면, 꾸는 자가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난 죽지 않았었잖아요. 기억해요? 아, 인간의 형태는 더 이상 소용이 없어요. 꿈이죠. 꿈이라는 경계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죠. 호그와트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새가 되어 이곳저곳 다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죽게 되겠죠. 알다시피 슬픈 이야기는 아니죠. 난 너무 궁금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보게 될까봐서 두려웠으니까요. 애니마구스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괜찮아졌지만 그 충동과 충동이 가져오는 불안의 기억마저 지워버릴 순 없죠.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되는 것이 나아요. 만약 죽어볼 수 있다면 진즉에 죽어봤을 거예요. 결코 ‘진짜’죽음은 되지 못했겠지만, 어찌되든 그 결말은 장례겠죠. 쪽지는 그런 것이에요.
음... 우린 밖에서 대화를 참 하지 않았죠. 하지만 보고는 있었어요. 물론 누가 그쪽을 그저 흘려보냈을까요? 워낙 눈에 띄니까요. 난... 그래, 봤어요. 하지만 이목을 끄는 그 가면을 봤던 건 아니에요. 시끄러운 말들을 본 것도 아니고. 난 궁금했어요. 알고 싶었고, 그래서 지켜본 거예요. 그래서 나는 당장에 말할 수 있었던 거죠. 미결의 존재라고.
가득찬 손짓, 넘치는 말들, 반딧불이의 꽁무니처럼 깜빡이는 가면의 표정, 오른쪽이었다가 금방 왼쪽으로 돌아서고,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금방 뒤로 빠지고... 결코 종잡을 수 없죠. 난 그걸 보면서 하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을 지속적으로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엇 하면 당신을 떠올리도록 놔두지 않았죠. 검지도 희지도 않아서 정체가 뭔지 모르도록.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모두가 아닌 것이 당신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최소한, 아니고자 하는 것이 당신이라고. 어느 하나로 정의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하지만 그쪽은 모든 속내를 가림으로써 감추는 존재가 되고 말았죠. 그리하기를 선택한... 자. 아아.. 이건 그저... 중요한 말들이 아니에요. 난 미결의 존재라고 말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말을 길게 했을 뿐이죠.
우리들이 초대받은 방. 나는 그곳에 의자가 총 다섯 개 있었다고 생각해요. 모런, 나, 당신, 루시엔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어떤 것, 어디서는 운명, 모이라 혹은 카르마 또는 유전과 환경의 조화 등등... 무엇이 되었든 우리 넷을 자리하게 한 뭔가가 앉을 곳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냈겠죠? 하지만 우린 그 방에 자리할 수 있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만약 정말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면 그때 그게 우리들이라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죽었던 이들에게 좋은 말은 아니지만, 당신과 저도 살고자하는 이들만큼 분명한 뭔가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뜬금없게도, 그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는 그랬어요. 아주 가끔씩 돌진하여 먼저 말을 걸기도 하지만 아닐 때, 나는 관심이 있어서 보고만 있을 때가 있거든요. 당장에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는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죠. 그리고... ... 이건 나중에 얘기하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남기고 날아갔다 다시 이렇게 찾아오게 된 이유를 말하고 싶어요. 난 날아서, 여기 저기 마을을 돌고 있었어요. 교복은 벗은 것이 오래라, 검은 원피스를 입고 다닐 때였죠. 밤처럼 차려 입었다는 말과 호의로부터 벗어나려 한 날, 난 기억해냈어요. 어떤 얼굴을 하나가 떠올랐죠. 그런데 난 그 얼굴을 몰라요. 처음 보는 낯. 그 얼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디를 가도 따라오고 꿈에서도 튀어나와 내 온 정신을 빨아들이고 일어나서도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내 하루를 잡아먹었죠. 난 그 얼굴, 손짓에 갇혀서... 어디 한 곳에 내 신호가 잡혀버린 것처럼 똑같은 정보만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난 그건 알고 있었어요. 내가 막 호그와트에 입학했을 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자아이의 우산을 계속해서 떠올렸던 적이 있거든요. 하나의 이미지, 장면, 있지도 않았던 향기, 색감, 움직임. 그걸 떠올리고 몇 개월 후에 그 아이를 좋아했음을 깨달았던 때와 같았죠. 이번에도 역시나 늦었지만, 이전보다는 빨랐어요. 문제는, 그 얼굴이 누구인가.
얼굴, 나는 결국 알아냈어요. 그리하여 이윽고 선택할 수 있었죠. 그냥 지나쳐 죽음의 여정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밝힐 것인지. 처음에 난 그저 가려고 했죠. 나에게 있어서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기에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네, 그렇죠. 좋아하는 것은 나의 마음일 뿐이고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아는 부분인 거죠. 그런데 문득, 내가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죽이러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 죽음이 도피가 되는 건 싫었어요. 특히 마음의 도피 말이죠. 그래서 돌아온 거예요. 그 얼굴에게로. 오, 이런 모르겠나요? 당신이에요. 첸 린.
난 가면을 벗은 모습을 본 적도, 볼 일도 없겠죠, 아마. 그런데 얼굴이었어요. 초상화를 그려내라면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나타나는, 정해지는 이목구비의 색과 모양새가 아니라 한 존재의 인상 같은 얼굴. 그건 당신이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모든 것들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애초에 더 빨리 알았다고 했어도 뭐가 달라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난 알았어야 하는 건지도 몰라요. 당신에게 질문 했을 때 말이죠. 말들을 듣고,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묻고, 입에 이름 올리기를 꺼렸을 때부터.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려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 그저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서라도, 그냥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시점에서부터 내게는 그쪽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냥... 아. 난 그저 야생화에 대해 알고 싶어 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책을 펼치는 것처럼 서 있을 뿐이었던 거죠.
그냥 그런 거예요. 그냥 우리가 대화를 굳이 나누지 않았어도 좋은 건 좋았던 거죠. 그래서 나는 그쪽이 죽어야만 하겠다고 하면 뱃사공에게 줄 동전을 건네고, 가야만 한다면 문 앞을 비켜서고, 다른 선택을 해야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죠. 내 마음의 여부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어떤 영향도 주고 싶지 않아서 또, 그게 당신의 선택이자 곧 첸 린이고 난 그냥 그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선언하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노라고. 린, 당신이 무어라 말할 것이든 나의 마음은 이렇고 그걸 전하고 싶었다고.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엔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 자리에 앉을 이들을 위해 제작되어 한 번 앉으면 다른 곳에서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포근하다. 초대 받아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 앉으면 다시는 그 방을 떠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착석한 이들은 모두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말했듯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표
모런과 대면한 것은 그 방에서였다. 플레타는 모런의 얼굴을 안다. 이름도 알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마주한 것이 처음인 거다. 막 청년의 티를 벗는 이 남자는 마치 금박을 입힌 동상 같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인상 깊어 후플푸프가 아니었다면 슬리데린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단호한 눈매와 여러 세대를 거쳐 가다듬어져, 유서 깊어 보이는 이목구비가 훌륭한 필기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플레타는 잠시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남자는 플레타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한다. 왜 그런지 몰라 그녀는 이전처럼 고개만을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을 고하자면 플레타는 푸르스름한 밤의 방, 그 자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그 남자를 앞서 유별나다 생각했던 적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여 이런 저런 별명도 붙여 주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프프리 부인 이었다. 종종 폼프리 부인이 자리를 비울 때면 아이들은 그 남자를 찾아가 치료를 요청하고, 그도 마치 어머니처럼 맞이해 주었던 것 같다. 이유는 몰라도 지독히도 사회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플레타는 그에게 ‘유별난’ 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모런은 가끔씩 뭔가에 질리다시피 지쳐있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친절하고 옳게 들릴 말들을 했기에 그녀는 연갈색 모래가 반쯤 차 있는, 모런이라는 작은 유리병에 ‘잔인할 정도로 반사회적이지 않음.’ 이라고 써 넣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플레타는 모런을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인물 박스로 밀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는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눈가로 밀어내는 바람처럼 궁금한 인물이었다.
아, 네 뒤에 아이가 있구나.
"왔어?"
모런이 플레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얼룩처럼 묻어나는 빛에 일렁이다 금방 꺼졌다. 플레타는 이 상황을 이전에 겪었던 것 같다. 기억은 쉽게 불려 나왔다. 방. 모두들 기꺼이 그 자리를 위해 죽을 조그마한 방이 플레타의 마음속으로 튀어 오른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그가 방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반가워요.' 그때도 그는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참으로 누군가를 맞이하는 자다. 플레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인다. 치워내는 자신의 손끝이 떫은 사과처럼 차게 얼어있었다. 몸은 종종 그녀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다.
“드디어 내 끝이야.”
그는 두 팔을 날개를 펼쳐내듯 벌린다. 눈가를 옅게 찡그리며 웃는다. 자 이제 내 마지막을 장식해줘.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타는 읽어낼 수 있었다. 모런이 남길 말로 이보다 더욱 어울릴 것은 없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모런을 겨눈다. 모런의 뒤로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인어가 제 온 몸으로 아름다운 색을 그에게로 쏟아내고 있었다. 살아있다. 늘 그렇듯이 모런은 지금 이 순간 온갖 빛에 둘러쌓여 숨 쉬며 생생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플레타의 목이 간지럽다. 그리고는 새삼 의문이 하나 잠잠하던 마음으로 떠오른다. 우리가 대화를 한 적 있던가요?
맑은
"안녕히."
알기로는 없다. 그러나 대신 나오는 것은 떠나보내는 이를 위하는 마지막 인사다. 둘은 방에 남아 차 한 잔 나눈 적 없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자처하고 그 마지막을 홀로 둘 수 없어 기꺼이 따라 나와 성사된 이 만남이, 처음과 끝 모두 누군가를 맞이하는 모런의 손짓과 그 죽음을 두 눈 치켜뜨고 지켜보고자 하는 걸음이 만든 이 공간 자체가 어떤 대화일지도 모른다.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담소지만 그것 또한 괜찮았다. 플레타는 잠시 창문을 응시하던 제 시선을 거두고 모런의 두 눈을 바라본다. 맑다. 플레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오후, 하루의 절반이 지나갔다. 오후는 곧 오전을 맞이할 것이다. 오후가 그 자체로서 최고점을 찍는 순간 오전이 된다. 오전이 오전으로서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내딛는 순간 오후가 된다. 우리는 오전을 위해서도, 오후를 위해서도 울어 줄 필요가 없다. 그것이 곧 다시 되돌아 올 것임을 알기때문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리버는 대학에서 짧게나마 배웠던 것으로, 사실 동아시아에서 배운 것들이지만, 시계를 보며 놀고 있었다. 기준을 1로 옮겼다가 2로 옮겼다, 다시 1과 2 중앙으로 옮겼다. 리버는 심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놀이에 만족했다.
시계가 울었다. 리버는 완벽한 1/3, 그 정삼각형을 보고 감탄했다. 0시 20분 40초였다.
리버는 어제와 오늘 원 안의 정삼각형을 두 번 보았다. 물론, 본 당시로 따지자면 오늘과 오늘이지만. 처음의 오늘은 오후였다. 오늘을 오늘로 치자면 오늘은 아직 오늘인 것이었다. 그러니 리버는 오후 4시 40초도 오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리버는 오늘 오후에 모니카와 함께 있었다. 그 시계를 보는 순간에 모니카는 막 하품을 마쳤는데 리버는 파란 쟁반 위에서 움직이는 차가운 바늘들을 보는데 너무나 열중해 있었기에 모니카의 모습이 희미했다.
모니카는 하품을 정리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소리를 냈다. 시계에서 새어나오는 일련의 움직임이 그 순간 산산조각 났다. 덕분에 리버는 모니카와 마주 앉아 있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름이...?" 모니카는 꽤 조심스러운 양반이었다. 리버와 모니카는 트위터로 대화를 하긴 했지만 서로의 이름을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모니카는 리버의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리버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요?" 리버는 자신의 마음이 내킬 때를 제외하고는 뭐든지 쉽게 내주는 법이 없다. "모니카에요." "모니카? 내가 아는 모니카와는 꽤 다르네요." "다른 모니카를 알아요?" "네 알죠. 비록 TV시리즈의 모니카지만." "아... 제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요." "저도 아니에요." "네, 알아요. 발음이 미국인은 아니니까요." 리버는 숨을 짧게 몰아 쉬고 계속해서 쳐지는 이 대화를 어떻게 끊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프렌즈에 나오는 모니카도 재밌어요. 한 번 보세요." 물론 별 소득은 없었다. "다음에요. 그래서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머그 그레이, 편한대로 불러요."
그리고 드디어 대화가 일단락됐다. 리버가 모니카 앞에 어떠한 형용사를 붙였든지간에 그를 양반이라고 칭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가 직접 구운 쿠키와 커피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습관이라고 하더라도 감사한 일이다. 리버는 그가 가져온 것 중에서 가장 얇고 가장 덜 달달해 보이는 쿠키를 하나 집어 물었다. 탁, 하고 앞니에서 부스러져 사방으로 과자 가루가 튀었다.
"그레이 씨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으세요?" 모니카의 기습 질문이었다. 어쩌면 다시금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용기일 수도 있었다. 지금 리버가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제외하면 새로운 이야기의 장을 열었을 수도 있었다. 리버는 손을 들어 올려 답을 기다리는 그를 달래듯 제재했다. 그리고 다시 오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입을 가리킴으로써 모든 의사를 전달한다. 모니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는 입 안에서 잘게 부서졌고 커피로도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흔적을 입 안 가득 남겼다. 리버는 두 어모금 더 커피를 마신 후에 말을 할 수 있었다. "침묵이요?" "네." "침묵의 불편함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니까 말하자면 불편하지 않다는 거네요."
다시 대화가 끊겼다. 모니카는 리버의 대답에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다. 리버의 커피가 바닥났을즈음 모니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에 리버는 그가 초능력이라고 가진 줄 알았다. 컵을 꿰뚫어 보고서는 커피를 더 가져오나 싶었으나 그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숙히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모니카는 리버가 사놓은 음반들을 구경했다. "클래식만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왜... ?" 내가 클래식만 들을 줄 알았던 거예요 하지만 꼬리를 물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연주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냥 실력은 아니던데, 어쩌면 제가 그저 막귀인 걸 수도 있죠."
삡삐-삡삐-삡삐-삡삐- 삐익-
1시다. 리버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마치 자다 막 일어난 사람 처럼 모든 것이 희미했다. 뿌옇다. 그간 누워서 무엇을 했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리버는 잠을 자는 것과 그저 누워 있었던 것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 건지 고민한다. 잠은 그저 꿈 속에 들어 갔다 나오는 것 같았다. 잠을 잔다고 해서 피곤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리버는 늘 꿈을 꿨다. 오늘 있었던 오후를 회상함이 꿈이 아닐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리는 계속해서 가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그녀 방 벽에 붙어 강렬하게 빛나는 푸른 시계, 꼭 마법에 걸린 것 같은 눈동자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는 무엇을 하든 꼭 이 세상을 그저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모니카가 그런 질문을 한 것이고 리버 또한 뭣도 모르고 걸려든 것이다. "실은 원래 피아니스트였어요." 하고.
숨이 트일 공간이 부족한 방 한켠. 금전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감히 할 불평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불평도 아니었다. 정말로 숨트일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그것을 토로했을 뿐이지 그리하여 자신이 이 방구석을 싫어한다거나 떠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머무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제 몸뚱아리도 갑갑하게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방은 인간 몸치고도 아주 넓었기에 리버는 그 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않았다. 트이지 않는 숨도 그리고 꿈도 모두 한 순간일 뿐이다.
리버는 더욱이 예민해 졌다. 끈질긴 형사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삼류취급을 받음에도 스스로 홈페이지를 내리지 않는, 악착같이 무언가 있다고 믿는 면이 꼭 음모론자 같은 저널리스트다. 엠마는 요 며칠새에 부쩍 너를 찾는 전화 또, 너에 대해 묻는 전화가 많아졌다고 했다. 형사는 아니었고 조금은 맹한 느낌을 주는 저널리스트였다고 했다. 형사는 그렇게 귀엽게 말하는 법을 모른다면서. 엠마의 투를 들어보니 자신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취급되지 않았더라면 학창시절 이야기나 리버의 사생활을 실수인 척 하며 흘려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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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당신이 줄리앤을 만나봤다면 좋았을텐데." 리스는 겨우 입을 연 참이었다. 돌돌 말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서, 하얗다 못해 회색으로까지 보이는 빈 컨버스처럼 아무것도 없던 음성에 들떠 고개를 위 아래로 까딱거렸다.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그렇게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또 본적이 없어요, 리스. 그러면 나는 웃겠지. 그게 사실이니까. 너보다도 훨씬 붉고 투명해. 웃음도 시원시원하고. 좋은 여자야." 리버는 그런 그를 보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 미쳐있는 것일까? 사실 그가 미쳐버린 것인지 미치고 싶은것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리버로서는 그가 이렇게 살기로 택한 것이 옳다고도 틀리다고도 말 할 수 없었다. 원래 말 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놔두기만 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멈춰야만 할 것이다. 현명한 자라면 알의 껍질과 막을 찢어 내지 않고도 제 뜻을 그 안의 생명에게 전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 확신이 없다. 리버는 앉은 채로 그네를 타듯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별로, 믿기지는 않네요." 리버는 곳곳에 묻어 있는 몸부림의 흔적을 보며 말했다. 리버는 먼저 리스의 눈을 바라보는 일이 적었다. 오히려 리스가 리버의 눈으로 다가왔다. 그럴때 마다 리버는 참, 우스운 일이지. 하고 생각했다. "왜?" 리스가 어깨를 격하게 흔들었다. 분명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 행동이었을 것이다. 리스는 제멋대로 움직인 어깨를 본다. "그 여자를 줄리앤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리고 다시 리버를 본다. 이상한 몸의 경련이나 흥분도 없이 아주 차분해 져서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아주 낯설고 또 새로워서 마치 그 여자와 재회하는 감격의 순간에 던져진 사람처럼 말이다. "도망갈래요?" "뭐?" "탈출해요. 줄리앤에게 가요." 리스가 웃었다. "넌 역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소설가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나 언제 자신이 그렇게나 논리적인 인간이었다고. 리버는 속으로 콧방귀를 뀐다. "가능해요." "어떻게." 짧지만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그가 스스로 그것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이야 말로 그의 재능이었다. 풍뎅이의 등껍질마냥 번뜩이는 눈이었다. 리버가 환영이 아니라 직접 마주하기 까지 몇 개월이 걸린 그 빛. "그야 당신은 아주 똑똑하고, 나는 그것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하니까." 리버는 불이 너무나 두려워 그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이 거대한 화염을 마주하고서나 지을 표정으로 리스를 바라보았다.
*
리버는 끊임없이 민감해져 가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영국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명백했다.
3. '최근의 고민은? 비가 오면 생각 나는 사람은 있어? 좋아, 사실은 이딴걸 질문하려는게 아니었어. 지금의 길에 후회는 없어?' ◼◼씨가 물었다.
01
음식. 먹는 거? 마시는 거? 어쨌든 아주 기이한 음식은 가리는 편이지만 야채 콩... 가지.. 오이 뭐 그런거 아, 당근. 그런걸 가리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편식은 아닌데 소식일 뿐. 그러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묻는다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참고로 피쉬 앤 칩스 보다는... 스파게티. 아, 나름 특별할 수도 있는 걸 말해보자면 한국 음식 좋아해요. 교수님이 한국인이셨는데 초대 받아 먹어보니 맛있더라고요. 강렬한 맛. 내 취향이에요.
02
녹색. 좋죠. 잔디, 나무, 이파리, 파, 브로컬리... 풋내나는 사과....
색으로 물들면 어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무의 잎들이 물들면 그 다음엔 끝이 기다리는 것 처럼. 그러니 녹색은 어려요. 파릇파릇하죠. 살아있고 생명 그 자체. 어쩌면 그 자체로 지능일지도 모르겠어요. 살아가는 것의 지능. 이건... 그냥 내 생각. 난 큐브릭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좋아하는 것 치고는 아직 다 보지 않았지만. 때로는 남겨두는 게 좋잖아요.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을 때나 꺼내 볼 새로운 것이 남아있다는 것의 안도가 있으니까.
녹색을 전.... 싫어하지 않아요. 맥의 아이셰도 색 중에서 녹색이 있는데, 좋아해요. 또 주황과 잘 어울리니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죠. 물론 녹색이 간혹 독이나 죽음과 가까운 느낌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건 붉은 색과 대비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녹색이 자연의 색이긴 하지만 우리 몸에 흐르는건 붉잖아요. 붉은 피 또한 살아있음을 상징하죠. 그런데 그것이 정 반대의 녹색이 되면 뭐.. 의미도 정반대. 그런거 아닐까 싶고. 사실 잘 몰라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내 생각을 물은 거죠? 녹색.... 좋죠.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엘파바의 피부를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었는데. 물론 그들은 녹색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다름을 싫어한 것이겠죠?
녹색의 것들은 끝이 없고 그것에 대한 내 생각도 끝이 없으니 이쯤에서 정리하죠. 난 녹색을 좋아해요. 사실 거의 모든 색을 다 좋아해요. 녹색은 참 예쁘고 좋은 색이에요. 기이함도 자연의 평화도 여린 생명도 모두 나타낼 수 있죠. 마음에 들어요.
03
최근의 고민... 나도 제대로 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싶어요.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창의성을 으깨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이기도 해요. 규칙 안에서 창의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완벽.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근원이고 신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비가 오면 생각 나는 사람이라.. 이런 질문 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구린.... 설문지...같은 거에서.
어쨌든 없어요. 비가 오면 내가 비 맞던 날이 생각나는데. 사실 비 내리는 날 떠올릴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질문이 있을까. 꼭 [결혼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 아직은 없어요. / 하하 제일 먼저 갈 사람이네.] 그런 대화와 비슷하죠. 어느 면에서냐면...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점이.
후
회
?
나.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즐기지 않아요. 인용은 인용하는 그 문장으로서 이미 완벽하니까. 꼭 내 말이 아니라도 되는 것이라면 왜 내가 말을 하겠어요? 하지만 모든 정보는 정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선택과 나열 혹은 재배열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니 굳이 인용해 보자면.
잠시만요, 난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니까... 몇 쪽인지를 알지 못해요. 가끔은 내 머리 안에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니 줄거리가 아주 확실한 내용이 아니라면 혹은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논문같은 것이 아니라면.... 난 몰라요.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다만 알죠. 알고 있어요. 여기에 있다는 걸.
< 리버는 들고 있던 책을 두드렸다. 단단한 표지에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처럼 하얀 배경 위에 자리하고 있고 아주 위쪽으로 바싹 붙은 제목이 있다. 길게 삐져나온 가름끈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
찾았어요.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은 좋아하는 책이에요. 제목부터가 나를 잡아 끌고있죠. 내가 만약 러브레터를 숨겨야 한다면 이 책에 숨겨 놓을 거야.... 물론 누군가의 길이 되어 줄지는 몰라도 내게는 아닌 그런 부류의 책이죠. 내게 길이 되는 책은 글쎄.
클래식?
후회라고 했죠? 지금의 길에 대한 후회. 후회라는 건 아주 무서운 거예요. 후회는 불안을 낳죠. 필연이에요. 또한 후회는 온전히 나만의..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후회할 법한 상황에 몰렸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후회하라는 법은 없어요. 때로는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그 끝을 향해 달려감을 기꺼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멍청한 일일수도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일 수도 있죠. 하지만 되도록이면 살아날 방법을 찾는 것이 좋아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요.
굳이 죽으려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어차피 모두에겐 마지막이 있는 법이니까. 또한 단 한번 뿐이라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무의미하다는 건 아주 제멋대로인 단어죠. 이유는... 생략하겠어요. 나만 알고있고 싶어서? 뭐 그럴 수도 있지만 귀찮아요. 어느정도 감은 오잖아. 아닌가?
그냥 이런 거예요. 무의미한 행위를 무의미함을 앎에도 계속하여 행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우리가 후회할 수 있는 건 한 번 행해진 것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타임머신! 난 타임머신을 좋아하는데 만약에 타임머신이 있어서 잘못을 고친다고 해도 이미 시간은 1 - 2 - 타임머신 사용 - 1 - 2' - 3' 로 나아가요. 알겠어요? 정말로 지워지지 않는 다고요. 후회해도 나아가는 수 밖엔 없어요.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후회에만 매달려서는 다른 길로도 가지 못하겠죠. 이건 태어난 것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일이에요.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아 그것을 후회한다고 해도 자살. 아니, 그 어떤 죽음도 그걸 없는 일로 만들지 못해요. 그냥 존재했던 당신을 존재하지 않게 할 뿐이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당신은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알겠어요?
후회 하느냐 하지 않느냐, 실상 중요하지 않아요. 이 물음이 아주 가치있을 때엔 죽음 앞에서. 그러나 죽음 앞에서 인생을 후회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곧 모든 건 사라져요. 내가 후회했다는 것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는 거죠. 천장이 우릴 집어 삼키고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러니 내가 후회하고 하지 않고. 소용 없이.
내가 양자 어느 쪽이든지간에 버티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네요.
그래도 바로 답하자면 글쓰는 걸 업으로 함을 후회하고 있진 않아요. 만약 이 길을 후회하는 나라면 그 어떤 일도, 직업도, 인생도 후회했을 거예요. 다만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은 내가 후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죠.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것. 그게 후회스럽네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 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저 바라고 그렇게 행하기만 해야할 뿐, 기다리는 것 또한 답은 안 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영역의 문제죠.
그렇다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왜죠?> 그런데 당신은 알까. 이 W는 여러가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어떠한 의도였는지는 상관이 없다. 물음은 자신도 모르는 욕구를 포함하고 있으니 내뱉은 입에게 연유를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의도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나온다. 예컨대 진정한 의도가 따로 있음에도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다는 소리다. 그러니 그 의도는 미래의 당신이나 혹은 나 또는 제 3자의 눈에게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궁금증이라는 소리는 집어치웠으면 한다. 먼저 제 3자의 눈에서 W 는 경멸이다. 이 경멸은 '무엇이든지'라는 범위가 나의 밝은 면이고 어두운 면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당신이 실로 어둠에 대해 물을 용기가 없다 하여도 내가 그러한 질문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태도가 내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불러 온다. 떳떳하다고 외친 적은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가정하고 자신의 비도덕성을 나에게 견주어 시험하려하는 것이다. 학교 교실에서 쓰일 프로젝터가 되어 버린 당신의 뿌연 렌즈를 바라보며 내가 < >라고 답한다면 그제야 마음 놓고 '미스 그레이, 그저 아이와도 같은 외침일 뿐이었군요.' 그렇게 말하며 웃겠지.
다음으로 내가 보는 W 는 동경인데 이건 그저 나를 자신이 바라는 비너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눈동자와 또 그 미로와 같은 굽이진 신경회로를 플라시보가 조각해 낸 것인 줄도 모른채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이건 당신의 감정과 또 나에 대한 호감에 기인하는 것이다. 자신은 가끔 몇몇 질문들 앞에서 떨었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질문에 대응하는 미덕에 관해서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 자신을 거절하지 않으니 자신 또한 남들과는 조금 다른 도장을 가진 학급의 아이라는 것이다. '너네는 이런 별 모양 도장이 없지? 난 그런 도장 가진 사람이야.' 하지만 당신은 내가 < >라고 답하면 금세 풀이 죽어 오히려 나를 원망하기에 이른다.
질문은 대화에 기초한다. 당신의 귀를 당기고 입을 열게 하는 마법이지만 동시에 결코 질문 자체로서는 완벽해 질 수도 질문이 될 수도 없다. 당신이 있고 내가 있는 사이에 질문이 자리하니 참 애석한 일이다. 결코 너와 나를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와 너를 벗어날 수 없음은 결국 그 말들 사이에 당신이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단숨에 들이키지도 말되 모두 뱉어내지도 말것. 질문을 보세요.
"무엇이든지 물어 봐요. 질문이 두려운 것은 아니니까. <답을 하는 것은 결국 나잖아요?> 그러니까 어서."
나는 그가 결코 고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누구는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며 그 신을 탓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설움이 더욱 처참할 수 있는 건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을 그저 보고만 있기에 그것이 서러운 거다. 차라리 신이 우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말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사물로 취급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거대한 돌덩이 처럼 말이다. 모호하고 어려운 말들로 그를 표현해 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큰 감정적 애착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로 지켜보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 분명 어떠한 관계에 신과 개인이 위치하는데에도 직접적인 교류는 없다. 따져보면 여자들이 한참 후에 가서야 울며 욕하는 나쁜 개새끼와 큰 차이가 없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데 정의되지는 않고 되짚으면 무언가가 있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어 속았다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 처럼 내게 사랑을 보여 주지 않는 당신을 원망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는 꽁꽁 언 원망 때문에라도 소리 지르며 나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로렌트 베이브, 참 온화한 이름이었다. 꼭 잘 다려진 셔츠처럼 큰 어긋남없는 남자였다. 조용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조용하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는 재밌는 농담도 곧 잘 했고 사람들에게 아주 못되게 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조용해 보이면서도 재밌는 사람을 문학을 찾는 이로 비유하기 마련이었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밌는 문학 청년, 그리고 그가 악기를 다룰줄 안다는 이유로 그 뒤로 '예술적인' 이라는 표현이 따라 붙었다. 그의 남다름을 부각시켜 예술가라고 즐겨 부르지 않았던 것은 예술가라고 하면 떠올리는 혼란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일렬로 나열 된 단추 같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거나 자신이 도망가 버리지도 않으면서 고요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그는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러기를 바라는 이였다.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은 곧 모두에게 잘해주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온화함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거두어 간 것이다. 나와 아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난 아니라면 애초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그는 아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말하자면 로렌은 남의 영역을 잘 지켜준다는 핑계로 스스로가 평온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일이 맑았으면 하는 사람은 내리는 비에 질린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가 조용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결코 자체로 고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당신에게 난 뭐예요?"
그는 늘 침몰하고 있는 배를 마음의 바다에 띄워 놓기라도 한 듯 굴었다. 감정이 바다라고 한다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배가 되어 가라앉고 떠오르기를 하루에도 수십번 그렇게 반복하는 것이다. 배는 날이 갈 수록 낡아가고 바다는 한 없이 출렁인다. 때로 바다가 잔잔할 적엔 그는 잔잔함에 겁을 먹었다. 혼란스러움 없는 선택은 이제껏 없었기에 오히려 명확함이 낯설고 거짓 같은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조심히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그가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고 하여도 자신의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결혼은 나라는 배와 너라는 배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배를 탄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리버, 말해 봐. 너에게 난 뭐야?"
질문의 끝자락이 떨렸다. 질문은 섬세하고도 정확했다. 그는 스스로의 물음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꼭 이렇게 말해야만 답을 알겠냐는 눈짓이다. 나는 너의 말에 '도대체'가 빠졌다고 말할까 하다 이것이 내 도피처임을 알았다. "나에게 너는 무엇이냐고?" 그러나 나오는 말 또한 같다. 단지 시간을 아주 조금 벌었을 뿐이다.
만약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아무것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진실로 처음, 그 처음으로 돌돌돌 실을 말아 다시 제대로 풀어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만약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 하나 짚어나가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을 나열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깨우친다면 그 이후에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모든 것을 짚어 이건 사실 내 어리석음이지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말해야 할까? 만약에 내가 말한다면 그가 내 인생의 난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 처럼 결국 널 불행하게 만든 나쁜년이 되고 마는 걸까. 만약에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함으로써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Nothing."
"리버.."
"넌 그냥 너야. 마치 저기 놓인 저 책처럼."
나는 테이블 끝에 놓여 있는 까만 표지에 주황색 폰트로 크게 2라고 쓰여진 카뮈 전집을 가리켰다. 나는 어디로 가기로 선택한 것일까. 그 의문은 무슨 표정인지 종잡을 수 없는 로렌과 내 속으로 기어들어가 반병신 처럼 앉아 있는 나와 또, 내 손가락 끝에 달린 저 책도 모를 것이었다.
리버는 불과 보름 전만 하더라도 은하계 하나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 주근깨가 아름다운 소년이 ‘이제 출발합시다.’ 그렇게 말하기만 하여도 소규모 은하 하나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그 먼지들이 새로운 별의 탄생을 준비할 것인데 소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로운 출발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소년이 머뭇머뭇 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를 삼일 째, 리버는 그저 자신이 지쳤거니 생각했다.
주근깨 소년은 말없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 봤다. 둥글넙적한 엄지 옆으로 검지 발가락이 솟았다. 이런 발을 가진 아들 딸을 둔 어미는 그 아비보다 빨리 죽는다던데 소년의 어머니는 딱 그 말 대로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모든 장비를 확인했다. 이제… 소년의 확신에 찬, 미래로 튀어나갈 듯한 외침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말이 없다. 답이 없다. 소리가 없다… 그 소년의 모습에 불안해 한 것은 그의 아버지도 엔진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던 아저씨도 초조하게 오더키를 쥐고 있는 젊은 여자도 아닌 바로 리버였다. 비록 도망자 신세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있었고 큰 안전의 위협도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가죽을 덧댄 나무 의자에 앉아 무료한 듯 톡톡톡,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듯 내지는 베토벤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처럼 광폭하게 자판을 괴롭히는 것 밖에 없었는데도 소년이 목소리를 끄집어 내지 않아 물 끓는 주전자처럼 빽빽 비명을 지르는 건 리버였다. 난관에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리버는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모르고서 자신이 미쳤거니 생각했다.
하는 수 없이 리버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잘려야 하는 말허리를 정원사 나무 손질하듯 싹둑 자르고, 계절 맞지 않는 촌스러운 도자기 장식들을 치우고, 제 갈길 못 찾은 귀여운 24개의 알파벳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했다.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이었다. 이런 모습에 놀란 건 그녀의 거지같은 편집장이 아니라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준 친구였다. “너 미쳤어?” 친구는 그렇게 물었다. “아니.. 음… 아니. 미친 거 같아.” 리버는 그렇게 답하고서 사라진 마침표를 5장 끄트머리로 돌려보냈다.
새삼스러운 것은 친구의 반응이 아니라 리버였다. 리버는 꾸준한 성격이 되질 못했다. 이 상황을 ‘여느 때’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그녀는 잠시 자판을 멀리하고 며칠을 푹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잠시가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그렇게 삼주를 넘어서 한 달로 치달을 즈음 편집장과 굶어 죽을 거냐는 친구의 잔소리에 다시 자판 앞으로 떠 밀려 갔을 텐데 이번에는 거머리처럼 자판에 들러붙어 있는 쪽이 리버였다. 그녀의 편집장이 보았을 때엔 잘 된 일이었지만 리버의 친구에게 드문 드문 들리는 자판 소리는 그녀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으로 들렸다.
닷새 후, 리버의 시간여행은 끝이 났다. 다시금 붉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소년의 앞에 섰다. 말해. 어서 출발하라고 말해. 소년은 자신의 맨발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앞에 자리한 여자의 발을 본다. 보라색으로 칠을 했네요. 소년의 눈길이 그렇게 말했다. 묵직한 침묵이 사방팔방으로 빛을 반사해대는 하얀 방 구석구석으로 튕겨 나갔다. 점. 점. 점. 여자의 눈앞에 고딕체의 마침표가 크게 세 개 놓였다. 그리고 그 마침표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소년의 시선은 여자의 발에 올라타서 다리로 기어 올라왔다. 골반을 지나서 허리를 짚고 가슴을 넘어 여자의 어깨로. 그리고 주근깨 총총히 박힌 붉은 머리 소년이 고개를 온전히 다 쳐들고 ‘이제 출발합시다.’ 대신에 ‘리버, 나 더 이상 못하겠어요. 출발하라고 말 할 수 없어요. 모두 멈춰요. 우린 여기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주 똑바르게 리버와 눈 맞춘다. 여자는 너무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동시에 자판이 달궈진 자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뗐다. 리버는 얕게 숨을 내뱉으며 화면을 바라본다.
"… ㅣ
리버가 마주하기를 피한 문서에서 소년은 … 그리고 다른 말없이 커서만을 깜빡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검다. 화면이 참으로 검었다. 글자들로 빽빽히 채워져 소년이 터놓은 커서 뒤로는 숨 쉴 틈이 없다. 테세우스가 바꿔 달기를 깜빡한 조기처럼 새카맣고 불길했다. 그래서 리버는 아이게우스처럼 온 몸을 고꾸라뜨려 아래로, 아래로 자신을 처박아 넣었다.
***
학창시절 노직을 신봉하던 참 잘난 놈이 하나 있었다. 그 녀석은 결 좋게 넘실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합이 아주 훌륭했다. 말하자면 외모로 남자와 여자를 여럿 울렸다. 제 어미도 아비도 그렇게 훌륭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놈은 자기 입으로도 자신이 집안의 변종이라고 했다. 그래, 우연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복권 당첨자를 뱉어 내듯이 이렇게 ‘탁월한’ 외모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놈’은 남학생이었고 머리도 아주 좋아 멘사 회원이었다. 이 어이없는 운의 배분을 더 말하자면 그는 키도 컸다. 목소리도 좋았다. 성격도 자신이 잘난 줄을 알고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과한 자신감만 빼면 아주 좋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잘난 외모와 타고난 말재주 그리고 똑똑한 머리로 한 자리 꿰차도 약자를 잊지는 않을 정도의 배려심까지도 가진 미래 유망주였다는 소리다. 그는 롤즈가 정의론을 얘기한 것은 아주 ‘탁월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사실 자신이 이룩한 성취를 멍청하고 느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며 비웃었다. 사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열심히 해서 번 것이 아주 정당하다, 노직에 찬성한다고 손들 들어 올린 아이들의 거친 주장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롤즈의 편에 섰던 리버는 기가 찼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히나 여겨 이 머저리들아.
그래도 리버는 자신에게 재능의 i, 그 위의 점만큼이라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감사해했다. 건반위에서 손을 굴리는 능력은 평범하지 않아서 뽑기에서 경품을 뽑은 격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앞으로 이런 한심한 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되겠지하고 방심했는데 주변인 모두가 허탈해 할 정도로 쉽게, 그리고 빠르게 리버는 레코딩 음반 몇 개를 끝으로 피아노 의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노직과 롤즈의 틈새로 되돌아갔다.
옥스퍼드대학의 식당은 융합적 인재를 끌어내기 위해 늘 시끄러웠다. 여러 과 학생들은 밥 먹는데 집중하는 대신에 음식은 코로 집어넣고 자신의 입이 똑바른 말을 하고 있는지, 저 새끼가 무슨 소리로 짖어대는지를 신경 썼다. 그런 난장판에서 리버라고 해서 다른 과 아이들이 피해갈리 없었다. 특히나 리버는 대학 초에 어떤 교수님과의 해프닝을 만들어낸 학생이었기에 아이들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려하지 않았다. 늘 그녀에게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리버가 참다못해서 아주 정중하게, 그러나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생각은 너네들 스스로 하면 안 될까? 난 좀 쉬고 싶은데. 그리고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전과하든지 수업을 듣든지 나랑 아주 친해지든지 아니면 내 블로그라도 해킹하든지. 제발 날 좀 놔둘래? 내 빵이 스프에 처박히는지 물에 빠져 스펀지밥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거든.’ 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노골적인 언사에 리버에게 세상의 운을 어떻게 건드리냐며 차라리 노직이 현실적이야, 그렇게 말하던 코크니 사투리를 쓰는 런던 출신 줄리아는 ‘네 잘난 줄 아는 게 꼭 에드워드 꼴이군, 너도 알지? 그 잘난 금발새끼가 장애인이 됐듯 너도 조심해. 롤즈를 그저 네 미래를 위한 보험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말이야’ 라며 리버에게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하지만 리버는 자신도 알고 있을 금발 에드워드 새끼를 기억해 냈고 장애인이라는, 그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단어를 이어 붙이느라 기분나빠할 겨를이 없었다. 일주일간의 노력끝에 리버는 겨우 겨우 재수 없는데다가 금발인 에드워드와 다시 연락할 수 있었는데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후였다.
에드워드는 퇴물이 된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중 재수 없게도 거친 녀석들의 총격전에 휘말렸고, 운 좋게도 살아남았지만 척추에 박힌 총알로 인해서 말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비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잘난 놈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그런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것은 밤늦게 돌아다니던 개인의 잘못이고 그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놈이 됐다. 이젠 왜 그게 자신이여야만 하냐고 통탄해 하는 불쌍한 청년일 뿐이었다. 똥오줌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산송장, 리버는 알고 있었음에도 세상은 참, 능력이 곧 모든 것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지금 리버가 전신을 아래로 던진 시점에 다시 찾아왔다. 자신보다 내용 없고 그 겉만 번지르르한 글은 때 마침 눈에 띄어 운 좋게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고, 모두가 SNS라는 사이렌에 홀려 돈을 주고 책을 구입할 때 자신이 곧 ’신’인 노트북 앞에서 인류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의 입 하나를 움직이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꼴이라니! 자신감 넘치는 필체로 MUG GRAY 라고 이름 쓴 첫 원고가 좋지 않은 성적으로 소수의 매니아층만 만들어 왔을 때 구멍 난 양말보다도 못한 아류의 아류냄새가 폴폴나는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스토리는 대충 이렇게 해요. 누가 이런 SF를 봅니까. 미스 그레이, 만약 또 다시 그렇게 인류를 초토화 시켜버리면 …. 이 다음은 힘들 거예요.’
처녀작은 리버 스스로 자신했다. 재조명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출판사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10만의 인류를 위해 함선을 출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리버는 떠날 수가 없었다. 차분히 태어났던 그 자리에 서서 은하계를 가루삼지 않고 조용히 내일도 그 내일도 100년이 넘어가는 그 날에도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류의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리버는 쌩 하니 종족을 위함이라며 가뿐하게 나아갈 수 없다. 도저히 그 아기를 놔두고 지구를 떠날 수 없었다.
아기.
‘그 아기. 그런데 이 아기는 어디에서 왔지?’
리버는 눈을 가린 채 소파에 늘어져,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스테이크 행세를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주근깨 소년은 자꾸만 한 아기가 마음에 걸려 출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꼬마 공주님. 엄마의 품에 쏙 안겨 울지도 않고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아기가 리버에게 있다. 하지만 도대체 현실인지 꿈인지 상상이었는지 분간할 수도,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도 없는 곳에 아기는 있었다. 리버는 당장에 그 아기에게 답이 있을 것을 알았으나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결국 문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
가끔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법이다. 리버가 꼭 그러했다. 자신을 담당하는 불쌍한 해리는 마지막 부분에 와서 미쳤냐며 계약해지금을 운운해댔다. 그는 리버가 글을 똥 같은 글이라도 완성해 가기만 하면, 진짜 똥은 아니라는 이유로 괜찮다며 출판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작가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식으로다가 ‘개똥도 필요한 사람이 있듯이 글도 그런 거 아니겠어요?’ 시발. 하지만 작가가 똥만도 못한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좋아하면 그건 무슨 고문이냐는 말이다. 작가는 그 끔찍함에 통장에 날아와 꽂히는 인세를 보며 더욱 절망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 갈 거다. 그건 거짓으로 사는 세상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거짓만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라는 것을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말해주기에 차마 부정할 수 없어, 실성한 나무에서 난 이른 이파리처럼 얼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고문을 말하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는 게 어디냐며 배부른 소리 한다 인생 설교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리버는 그런 식으로 양심을 팔아 배부르니 차라리 인간임을 포기하고 연쇄살인마가 되어 자신의 철학을 펼칠 여자였다. 따져 보면 모두가 회사 책상에 앉아서 혹은 두 부인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지구가 돈다고 말할 것인가 목숨을 위해 입 닥치고 부를 위해 거짓말까지 할 것인가 그런 식으로 한 번씩은 겪는 문제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부딪힌적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학부시절의 리버는 자신의 뒤에 봐줄 만한 가족이 버티고 있었다는 걸 아주 잘 알았으니 자연주의의 오류를 칸트가 해결할 수 있다는 과격하고 겁 없는 미친 소리를 굽히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뒤엔 아무도 없었고 그녀 명의로 된 통장은 금지된 지 오래에, 당장에 쥐고 있는 처녀작 인세도 별로 남아 있질 않았다. 모두 눈 감고 넘기는 문제인데 리버는 아직은 배가 부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살인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편집장이 아니다. 아예 범죄자로 이직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리버는 오랜만에 성질이 제대로 났다. “누가 진짜 돈이 없어서 계약해지를 못하나 인터폴이 무서워서 못하지.” 여자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좀처럼 자제하던 외출을 마음먹는다. 바닥으로 뛰어 들고 자판이 사막의 태양으로 달궈진 철판인양 손도 대지 않은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리버는 햄엔 포크(리버는 이 가게를 볼 때 마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에서 클럽 샌드위치를 꼭 가게에 앉아 양상추 하나까지 싹 쓸어 먹고 가던 것과 다르게 포장을 부탁했다. 금발 머리 아르바이트생은 생글 생글 웃는 낯으로 늘 가게에서 먹고 가던 그녀의 안부를 걱정했다. 돈벌이에 지쳐 서비스용 미소를 지워내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돈, 그놈의 돈. 리버는 넌더리가 난다. 그래서 여자는 잘 깜빡이지도 않는 눈을 감으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리버는 그저 아무 바위에나 가 박혀 화석이 되고 싶었다. 이왕이면 자신의 고향인 데본셔 바닷가의 돌이 되어 파도에 깎이고 깎이고 또 깎여 모아이석상처럼 네모로 우뚝 서고 싶다. 그러다 제 몸이 다 쓸려 가면 쓸려가는 대로, 그 거센 파도에 맞서는 그 임무를 다 행했다는 기쁨으로 잠들고 싶었다. 그런 시원한 심상이 곧 파도를 피해 달아나는 법인 줄은 모르고서.
“당신의 재능을 제가 사겠어요!”
리버는 눈을 떠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미쳤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여자가 서 있었다. 이열치열이라지만 목도리는 너무하잖아? 그러다가 곧 바로 자신도 우비를 하나 장만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 파는 거 아닌데요.”
땡땡이 무늬가 어지러워 정신이 사납다. 동그라미들은 갑갑한 천 쪼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건 원피스의 끝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동그라미들이 여느 때보다도 더욱 부산스러운 것은 아마 원피스 위로 숨 쉬기 힘들 비닐 우비가 자리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우비는 리버 자신에게 맞을 만큼 컸다.
“당신 예술가 아니에요? 아, 참! 난 엔젤이에요.”
자신의 이름을 엔젤이라고 소개한 통에 리버는 잠시 그녀가 왜 선량한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다가 조금 늦게 이름인 줄을 알았다. 엔젤의 목소리는 트롤리 샤우어의 하얀 가루처럼 시다.
“작가죠.”
“그 손가락으로 글만 쓴다고요?”
“네.”
리버는 여성스럽고 애교스러운 축에 끼는 엔젤의 목소리를 찬찬히 훑다가 여자가, 혹은 소녀가 한 붉은 색 목도리를 보고 자신이 주문한 샌드위치의 햄을 떠올렸다. 여자의 볼도 불 오른 그릴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잘 익은 얼굴 위로 사과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팝아트적인 의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여자는 땀이 소나기처럼 가득 찼을 것 같은 겨울용 어그부츠를 신고 있었다. 또, 짝이 다른 양말이 어그부츠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차림 하나 하나에는 어울리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이다. 양말은 사람이 때로는 마음에 드는 양말 두 컬레를 모두 신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크게 고개 저을 일은 아니었다. 어그부츠도 우비와 나름 짝을 이뤘다. 땡땡이 원피스는 투명한 비닐 우비 안에 옷을 입지 않는 것이 더욱 이상한 사람일 테니 납득이 되었다. 다만 조금 아이러니 한 것이 목도리였는데… 뭐 여름에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지. 리버는 이 여자를 안다. 소년이 실어증에 걸리기 전까지 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몇 번이고 이 조랑말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묘하게 짝이 맞는 옷차림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낙이기도 했다.
“뭐-어. 어쨌든 제가 당신에게 집을 빌려 줄 게요. 물론 공짜. 생활비도 드리고요. 대신.”
“대신, 뭐. 그 집 페인트 유독성 실험하고 그런 거예요? 아니면 다큐멘터리? 죄수와 간수 같은 심리실험?”
“아니요! 요즘 만나는 사람들 마다 의심이 더욱 깊네요, 그런 게 아니에요. 꿍꿍이 있어 보이지만 없다는 게 반전이랍니다. 다만 내 지원이 헛되지 않도록 렌트에 머물며 자신을 다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세요.”
“못 받으면? 그땐 제 장기를 기증해야 하나요?”
“음, 그때 가서 도로 다 토해내시든지요.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읽었거든요.”
뭘요? 그렇게 되물으려다 리버는 참으로 헛된 일임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녀작일 것이 분명했다. 엔젤은 꼭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몇 마디 더 하더니 종이를 하나 건네고 사라졌다. 리버는 되묻지 않음과 동시에 모든 답을 함구했다. 엔젤이 가겠다며 인사를 건넬 때에도 답하지 않았다.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너무 거대한 탈출구라 그 불안함이 배였다. 교수가 자신에게 같이 연구할 것을 제안할 때 느꼈던 것 보다 더욱 거센 불안과 흥분이 리버를 빨아들였다. 리버는 그만 입맛마저 달아나서 길거리 부랑자에게 자신의 샌드위치를 건네고는 집으로 올라갔다.
친구는 리버가 미쳤다고 했다. 정신병자 도와주느라 유괴범 되어서 인생 말아먹기 직전까지 밀려 온 주제에 정신을 못 차렸다고 주절 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넌 예전부터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나 만나기 전의 친구들을 봐도 그래. 야, 너 만약 거기서 잘못 되어서 내가 경찰을 불러 준다고 해도 그 다음엔? 영국으로 강제 소환이야. 그리고 감옥에나 가겠지! 어쩌면 널 싫어하는 족속들이 너가 싸이코패스라고 증언해 줄지도 몰라. 정신 차려, 리버.” 리버는 친구의 ‘비난’이 조금 거슬렸지만 크게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친구의 약혼자가 리버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기에 결국 그 비난은 친구 스스로도 바보라는 걸 증명하는 꼴 밖에는 안 되었다. “리버, 거기 가면 그게 호구 등신이야. 나는 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냥 적으면 되잖아. 그냥 그 소설 마무리 하면 되잖아. 네가 정 못하겠으면 내가 대신 마무리 해 줄게.” 응? 하고 친구는 소파에 난 주름만 응시하고 있는 리버를 달랬다. 그곳에 가지마. 어딘 줄을 알고 가. 미국엔 또라이들이 더 많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사실 네가 바라는 마지막이 더 이상한 걸 수도 있어. 문제의 그 소년이 가자고만 하면 은하계 하나가 전부 사라지더라도 그… 어쨌든 그걸로 다시 지구를 세우고 우주선으로 대피했던 인류가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잖아. 너는 왜,” 친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리버가 끌어내려는 마지막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말인지 새삼 느꼈을 것이다. 왜. 너는 굳이 죽으려고 하니? 그러나 친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지구에 남아있는 인간들 때문에 인류의 뜻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건데? 뭐야, 공리주의가 문제야?”
‘아니, 꼭 공리주의가 문제인 건 아니야, 엠마. 그걸 문제로 빌빌거린다면 마이클 센댈에게 이 메일이라도 보내지. 물론 그가 공동체주의자인 걸 감안하면, 답은 뻔하지만.’
“좀!”
‘엠마, 나는 가끔씩 네가…’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정말로 짜증나.’
리버는 엉덩이 아래로 너무 푹 꺼지지도, 늪에 드러누운 듯 전신을 끌어당기지 않는 이 소파가 좋다. 아주 적당한 탄력. 아주 적당한 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데 이 소파는 그런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리버는 이 소파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리버는 조용히 대합실 소파에 앉아서 이 아파트가 정말로 어떤 곳일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먼저 리버의 왼발 새끼발가락에서 2시 방향, 누가 의자를 바닥에 놓고 휘두르기라도 하였는지 얕지만 강하게 반원을 그린 자국을 보자. 이건 가구 운반 도중에 불쌍한 바닥을 짓누른 흔적일 수도 있지만 살고 싶어 하는 이가 발악하는 소리 대신 그 설움으로 유언 남기듯 기록해 놓은 흔적일 수도 있었다. 하긴, 이곳은 예술가들이 사는 아파트라고 하였지. 모두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단지 성공만을 위해서 예술을 그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건 예술가라고 부르기도 참 민망하고 애매한 존재였다. 그러나 리버는 애초에 엔젤이라는 여자가 입주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모르는 여자에 대한 광신도 못지않은 믿음이 솟구쳐 그 흔적이걸랑 누군가의 상처겠거니 생각했다.
다음으로 이 아파트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모두가 각자의 작업공간을 존중하고 있었다. 무례해도 정말로 무례하지는 않았고 침착한 이들 역시 정말로 침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억지로 사회화되다만 각자가 스스로의 폭탄을 안고 언제 터트릴 것인가 그 시기를 노리고 있는 듯 했다. 리버는 렌트가 아주 새로운 곳은 아니라는 느낌에 조금 안도했다.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리버는 고개 들지 않았다. 아직은 외부인인 자신은 그저 모두가 거쳐 가는 대합실 그 소파처럼 가만히 앉아서 이곳이 가짜인가 진짜인가 그걸 간파해보고 싶을 뿐이다. 진짜인가 가짜인가, 가짜인가 진짜인가하는 물음 만큼 이나 진실찾는 거짓말 같고 거짓말 같은 고뇌였다. 몇 번인가 손가락으로 허공 연주를 하던 리버는 스스로 만족해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과연 세상보다는 진짜 같았다.
노크는 두 번. 리버는 같이 미국으로 건너온 남자와 정했던 신호가 떠올랐다. 노크 두 번, 위험하다. 노크 한 번, 안전하다. 리버는 시작을 좋게 하고 싶었다. 노크 한 번만 하는 거야. 그런데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재빨랐다.
"뭐."
집시. 리버는 히스클리프를 떠올렸다. 그건 그가 집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집시 태생의 히스클리프를 떠올린 것인지 그의 차림이 히스클리프만큼이나 신경질적으로 보였기에 밑도 끝도 없이 캐서린 하나만을 쫓았던 그 남자가 떠오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리버는 그가 J.J임을 확신했다.
"뭐가요?"
"당신 말이야."
"전 머그 그레이에요."
"J.J, 용건은?"
"엔젤이 당신을 찾으면 된다고 했어요."
"아. 그 여자가? 제대로 찾아 왔어."
"나도 알아요."
남자는 방문을 열다 말고 리버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리버는 어쩐지 해명해야 할 거 같아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J.J라고 말했으니까요. 남자는 비웃음보다는 조금 멀고 불쾌함보다는 더욱 멀며 철없는 대꾸에 반응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함에 가장 가까운 몸짓으로 방문을 열었다. 갇혀 있던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밀려왔다. 뿌연 공기로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그 향이 아주 지독했다. 담배를 모르는 아이라면 그의 방을 독가스실로 착각할 정도였다. 리버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오래 참아보려 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다. 남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의 침대 옆 금고로 다가갔는데 그가 금고를 열고 건네줄 무언가를 꺼내는 동안 리버는 질식해 버릴 거 같았으므로 조용히 뒷걸음질 쳐 문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천천히 금고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 또 그것을 한참 살펴보더니 몸을 돌려 리버를 찾았다.
"이게 열쇠야. 뭐야, 입주 안 해?"
그는 복도에 서서 방문이 닫히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리버를 보며 귀찮게 금고를 왜 열게 했냐는 한탄 섞인 짜증을 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리버는 담배연기를 적게 마시려고 아주 작게 말했다. 덕분에 남자는 리버가 입주하지 않기로 했는지, 입주하기로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열쇠를 자신의 주머니로 집어넣었는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망설였음에도 다급해진 리버는 덜컥 소리를 내질러 버렸다.
"아니! 잠시 문턱에 대해서 생각 하느라요! 주세요, 열쇠."
허, 참. 그래 여긴 별난 놈들이 오는 곳이지. 그는 큰 표정대신 호흡이나 움찔거리는 미간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리버에게로 걸어왔다. 치렁치렁한 머리와 하늘하늘한 옷이 집시와 또, 사막의 부랑자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라비안나이트에 아주 어울리나 싶었으나 리버는 그 정확한 시대를 몰랐고 또 의상도 제대로 몰랐으니 자신의 감상을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리버가 그가 신은 검정과 하얀 스트라이프 슬리퍼가 무언가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즈음 J.J는 리버가 내민 손 위로 방 열쇠를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리버는 열쇠 하나만 쥐고 렌트를 나왔다. 그녀는 일단 렌트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고 싶어 왔으니 단신이었다. 친구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남아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핸드폰 밧데리가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친구 집에 가서 렌트로 자리 옮김을 선언하고 잔소리를 들어가며 짐을 싸면 내일엔 친구의 약혼자가 리버를 말릴 것이다. 그러나 모레가 되면 자신은 이미 그 곳에 없을 터였다. 밖은 아직 해가 시간을 잊은 듯 밝았다. 그리고 일순간 망치가 못을 벽으로 밀어 붙이듯 강하게,
아, 기억났다. 그 아기.
롤즈는 인간이 보험에 가입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그러니 줄리아의 말이 아주 비아냥은 아니다. 사실의 나열.
노직과 롤즈에 대한 부분은 주관적. 노직도 사유재산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재밌고 좋다. 내가 롤즈의 이론을 조금 더 선호하는 것을 증폭시켰다. 리버는 늘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민감하다. 그리고 리버는 운을 믿음으로 성공이 온전히 개인의 노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입장이다. 빗대어 표현한 것에 가깝다.
리버는 아직도 자연주의의 오류와 칸트를 믿는다.
아마, 엔젤의 돈으로 계약을 해지 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근깨 소년이 남기를 결정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다음 계약을 맺지 않는다.